결론부터 말하자면 꽤나 다양한 작물을 수확해 먹었다. 그 양이 아주 작고 소소하여 살짝 아쉬움도 있었으나 ‘소소한 수확 풍성한 기쁨’을 얻고 있다.
오이
오이는 금세 천장까지 닿을 만큼 자라나서 줄기를 다시 밑으로 유인해야 했다. 그 후에도 꽤나 무서운 기세로 자라더니 옆옆 화분에 있는 토마토 줄기까지 감으며 자라났다. 열심히 자라나는 기세 덕분인지 베란다 우영팟에서 가장 먼저 수확해 먹은 열매였다. 마트에서 사 먹을 것 같은 튼튼한 오이 3개를 수확해 먹었다. 그 이후에도 시간을 두고 두어 개 더 열리기는 했으나 오이가 노랗고 곧은 모양은 아니었다. 수꽃을 따주기 위해 가장 많이 들여다보고 관심을 기울였던 아이다.
방울토마토&토마토
토마토 무리도 오이만큼 무섭게 기세를 펼치며 자라났다. 토마토 하나, 방울토마토 두 개를 심었더니 셋이서 합세해 커다란 몸집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무럭무럭 크는 것을 지켜보다가 천장까지 닿을 때쯤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 싶어 생장점을 잘라버렸다. 방울토마토는 곁순을 잘 따준 덕분인지 가장 수확량이 좋았던 작물이다. 현관 앞에 베란다가 있다 보니 오며 가며 빨갛게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대충 슥슥 닦아 먹곤 했다. 방울토마토와 달리 토마토는 수확량도 상태도 좋지 않았다. 물이 마르고 영양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수확한 토마토는 요리에 활용해 곧잘 먹었다. 토마토 무리는 향이 진하고 열매 색이 고와서 우리 밭에서 가장 존재감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완두콩&강낭콩
완두콩은 아쉽게도 열매를 맺기도 전에 다 말라 죽어버렸다. 오히려 찬장에서 꺼내 심었던 미국산 흰강낭콩은 나름 여기저기 팔을 뻗어보더니 꽃도 피우고, 곧 콩도 달았다. 덩치 큰 토마토 밑에서 열심히 자기 영역을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자그마한 꽃이며 콩꼬투리도 신기해서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수확량은 미미했지만 기대 없이 심었던 흰강낭콩을 수확까지 하게 되다니 신기하고 대견했다. 요즘도 꽃을 피우고, 아주 작은 콩꼬투리도 달고 있다.
옥수수
무서운 기세로 냉큼 천장까지 자랐던 옥수수. 창밖으로 적극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햇빛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며 수확을 기대했었다. 기세 좋은 토마토 무리와 더불어 수확할 날만을 기다리곤 했는데, 아쉽게도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다. 수정이 안 되었던 건지 뭐가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잎이 하나둘 마르더니 이제는 아예 줄기 자체가 말라버렸다. 그래도 열악한 환경에서 참 잘 자라주어 고맙다. 자라는 걸 지켜보는 내내 그 곧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멋지다고 느꼈다.
단호박&애호박
아쉽게도 호박은 하나도 수정되지 않았다. 붓으로 열심히 수정을 시도해 보았지만 매번 실패했다. 요즘은 그냥 열심히 세를 확장해나가고, 잎을 달고, 수꽃을 피우는 것만 구경중이다. 애호박은 모두 죽었고, 단호박도 하나만 살아남아 계속 자라고 있다. 이 단호박은 마트에서 사먹고 남은 단호박 씨앗을 심은 거였다. 아직도 살아남아 계속 잎과 꽃을 내는 걸 보면서 좀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수정되지도 않은 암꽃을 보며 혹여나 호박에 벌레가 생기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하기도 했었다. 지켜보는 과정이 즐거웠고, 호박잎을 수확해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가지
다른 아이들에 밀려서 그랬던 건지 의외로 굉장히 느리게 잎을 내고, 꽃은 피워도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 했다. 성장도 더뎌서 아무래도 가지는 못 먹으려나 하던 찰나, 자그마한 가지가 하나 달렸다. 가지 모종은 두 개를 심었지만 열린 가지는 딱 하나다. 생긴 모습도 엉성하고 아직 크기도 작지만 이제 경쟁상대 없어진 밭에서 홀로 열심히 자라는 중이다.
수박
여러 번 꽃이 피고 그 때마다 나름 붓으로 열심히 수분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딱 하나 성공했다. 점점 자라나는 몸집이 신기하고 자그마한 수박도 귀여워서 계속 눈길이 갔다. 커다란 수박을 기대하며 물도 열심히 주고 기다려봤지만 주먹 정도 크기까지 크더니 거기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더 이상의 성장 없이 시간은 흐르고 결국 줄기가 말라버렸다. 드디어 오늘 아침, 걱정 반 기대 반하며 수박을 반으로 갈랐다. 제대로 영글지 못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름 빨간 속살을 갖추고 까맣고 딱딱한 씨앗도 꽤나 품고 있었다. 맛을 보았더니 나름 맛도 괜찮은 수박이었다. 애플수박이라 하기에도 크기가 작았지만 어쩌면 내가 심었던 게 애플수박 모종이 아니었을까 홀로 추측해 본다.
오이고추
오이고추 모종을 2개 심었었다. 테이블 밑 1층에서 낑기며 자라나던 아이들이다. 위치상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곁순도 거의 솎아주지 못 하고, 벌레의 습격을 받은 것도 뒤늦게 알아차리곤 했다. 그래도 쑥쑥 자라 하얀 꽃을 피우고, 바람에게 수분을 받더니 이내 커다란 고추를 달았다. 마트에서 사 먹을 것 같은 튼튼한 오이고추 3개를 수확해 먹었더니 그 이후로 오랫동안 감감무소식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테이블 위 2층까지 세를 확장하고 있고, 새롭게 꽃을 피우고 있다. 과연 또 열매를 달 수 있을지 지켜보는 중이다.
파프리카
파프리카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 같다. 성장세 좋은 다른 아이들에 가려 햇빛도 잘 못 받고, 거의 자라지 않았다. 그래도 옥수수와 방울토마토가 지고 나니 최근에서야 조금씩 성장을 시작한 것 같다. 최근에는 드디어 꽃도 피웠다. 과연 파프리카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남몰래 응원하며 지켜보는 중이다.
감자
역시 소소한 감자 수확량. 지난번에는 감자를 조금 일찍 수확해서 감자가 작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두 아이를 수확해보니 다들 작고 동글동글한 감자였다. 감자 수확은 흙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말 뽑기 전까지 얼마나 달려있을지, 크기는 어떨지 알 수 없다. 커다란 감자를 기대하며 흙 속을 뒤져서 감자를 골라내다보니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름 큰 감자를 발견하면 기분이 좋고, 어차피 내가 먹을 거니 작은 감자를 만나도 귀엽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데 감자 맛이 날까 오히려 신기하고 재밌는 구석도 있다. 싹이 난 감자에서 시작된 감자 기르기. 베란다에서 시도해보기에 가장 괜찮은 작물이 아닐까 싶다. 커다란 포대자루를 구해서 심으면 좋을 것 같고, 안 된다면 집에 있는 화분 중 가장 큰 화분에 심어도 괜찮다.
베란다 우영팟의 1차 수확이 얼추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다. 수확량이 적었던 원인을 나름 분석해 보자면 남향이라 할지라도 노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조량, 밑거름을 주지 않은 탓, 욕심쟁이 텃밭지기가 흙 조금에 우겨넣은 많은 작물들, 초보 텃밭지기의 미숙함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다른 존재를 돌보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무언가를 돌본다는 것은 시간을 쓰고, 애정을 쓰고 마음을 주는 일이다. 그 존재를 관찰하고, 그 존재에 대해 알아가고, 그 존재의 필요를 알아차린다. 필요를 잘 알아차리지 못 하거나, 그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 하면 나의 미숙한 돌봄 실력 때문에 힘들어 하는 대상을 지켜봐야 하는 괴로움도 맛보게 된다. 다른 존재를 돌보면서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돕고,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자라나 버린다. 이 돌봄에 익숙해지면 미숙함도 금방 사라질 것이다. 익숙해지면 이번처럼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며 사소한 것 하나에도 전전긍긍하고 기뻐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처럼 매 순간의 과정을 즐길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처음이 주는 어려움과 기쁨을 모두 온전히 누리고 싶은데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텃밭을 돌보면서 누군가를 꾸준히 돌보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뿐만 아니라 돌보는 일을 통해 서로를 채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돌보는 과정에서 특별한 애정과 관계가 형성된다. 매번 내가 마음을 쓴 만큼 결과가 돌아오지는 않지만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자라나는 걸 지켜보고 진심으로 응원하는 과정에서 나도 힘을 받는다. 사랑하고 마음을 주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따뜻하고 마음의 울림이 큰 행동이어서 그런 것 같다. 텃밭을 가꾸며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